근데 문제는 환시세였습니다. 구평가의 1달러 = 약 2엔의 교환비는 1920년대 말에 와서는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에 일본 경제계에서는 신평가 해금론 쪽으로 분위기가기울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금해금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장작림 폭사사건으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중지되고 민정당의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이 성립되고 재정정책을 관장하는 대장대신으로는 전 일본은행 총재인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임명됩니다. 이 이노우에는 1923년 대장상을 지냈던 적이 있었는데요. 원래는 해금을 반대했었는데 금본위제 복귀가 시대의 조류라고 보고 전격적으로 금해금을 결정합니다. 근데 교환비는 신평가 해금이 아니라 구평가 해금이었습니다. 더불어 강력한 긴축정책을 추진하는데요. 이당시 일본에서 가장 돈을 많이 끌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