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이야기

쇼와대공황?? 3

이궁이 2022. 1. 16. 22:38
728x90
반응형

근데 문제는 환시세였습니다.

구평가의 1달러 = 약 2엔의 교환비는 1920년대 말에 와서는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에 일본 경제계에서는 신평가 해금론 쪽으로 분위기가기울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금해금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장작림 폭사사건으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중지되고 민정당의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이 성립되고 재정정책을 관장하는 대장대신으로는 전 일본은행 총재인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임명됩니다.

이 이노우에는 1923년 대장상을 지냈던 적이 있었는데요.

원래는 해금을 반대했었는데 금본위제 복귀가 시대의 조류라고 보고 전격적으로 금해금을 결정합니다.

근데 교환비는 신평가 해금이 아니라 구평가 해금이었습니다.

더불어 강력한 긴축정책을 추진하는데요.

이당시 일본에서 가장 돈을 많이 끌어다 쓰는 게 군부였습니다.

그런데 내각에서 긴축정책을 결정하니 당연히 군비는 축소 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각의 급작스런 교체와 정책이 지연된 동안 대대적인 환투기가 일어났다는 데 있습니다.

즉 금해금이 지연되는 동안 국내외 은행에서 대량의 엔 매수, 달러 매도를 수행하여

100엔에 43달러 50센트

의 환율을 만들었다가

100엔 = 49달러 85센트

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대량의 엔 매도, 달러 매수를 해서

1930년 1월부터 6월까지 단 6개월만에 2억 3000만엔의 금이 국외로 빠져나갔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대량의 환치기 수법으로 나라 전체를 수렁으로 몰아넣은 거죠.

이걸로 일본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뽄당국은 구평가제 상태의 금해금을 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첫번째는 당시 니뽄의 심각한 정경유착(관료-군부-재벌)이었고

2째는 1차대전후 불황으로 인해 산업구조가 나약해졌다고 여긴 정부가 이 기회에 디플레, 재정긴축, 문제기업 정리, 기업의 경영합리화 유도, 장기적인 국제경쟁력 재고, 등으로 경제가 회복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금해금을 하기 바로 전년도에 1929년, 미국 월스트리트의 갑작스런 주가 폭락(the Wall Street Crash)을 시작으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금해금과 강력한 긴축정책은 끔찍한 시너지 효과를 냈습니다.

이때 니뽄 내각은 당시 국제금융의 중심지로 여겨진 시티 오브 런던만 안정되어 있다면 이 공황은 결국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기고 (이 당시 니뽄은 이상한 믿음으로 가득했던 듯 합니다 ㅜ.ㅜ)

더 강력한 긴축정책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이건 뭥미?)

모두들 아시다시피 세계대공황에 휘청이지 않은 나라들은 없었죠.

시티 오브 런던 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세계대공황을 통해서 경제중심지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영국을 믿고 긴축정책을 밀어붙인 니뽄 내각의 경제정책은 공황을 키우는 삽질 오브 삽질 킹삽질이 되버렸습니다.

이러한 세계 대공황과 금해금이 겹치면서 일어난 일본의 불황을 쇼와불황이라고 합니다.

물론 상기의 과정이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관점들이 존재하고 이론의 여지 또한 많이 있긴합니다.

그러나 상기의 관점이 오랫동안 인정되었던 관점인 만큼 기록해둡니다.


728x90
반응형

'방송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음 들어보는 전투 이름-마닐라 전투?  (0) 2022.01.27
쇼와대공황??4  (0) 2022.01.17
쇼와 대공황?? 2  (0) 2022.01.16
쇼와대공황?? 1  (0) 2022.01.11
내가 똘아인가봐용  (0) 2021.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