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이야기

처음 들어보는 전투 이름-마닐라 전투?

이궁이 2022. 1. 27.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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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전투 (1945년)

 

미국- 필리핀 연합군과 일본 제국 간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이 전투의 결과 3년에 걸친 일본군의 필리핀 지배는 막을 내립니다. 

 

맥아더가 최정예 부대를 데리고 링가옌만으로 상륙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예정일은 45년 1월 9일.

 

반면 일본은 루손섬 확보를 위한 결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나머지 예하 병력을 3개 집단으로 나누어 최대한 지구전을 실시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3개 집단 중

 

쇼오부 집단은 카라발로 산악지대의 방어에 주력

 

켐부 집단은 클라크 비행장 일대를 방어

 

심부 집단은 남부 루손을 방어하기로 했습니다. 

 

45년 1월 4일 레이테섬을 출발한 850척의 대함대는 링가옌만을 엄습합니다. 

 

이 작전으로 저녁무렵 68000명의 병력이 상륙합니다. 

 

이후 카라발 산악 방면을 견제하면서 클라크 비행장 일대를 장악합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마닐라 방어를 결심하고 한달간 치열한 시가전을 벌입니다. 

 

이 시가전끝에 미군이 마닐라를 점령하게 됩니다. 

 

위의 3개 집단은 켐부 집단은 쉽게 격파되었지만, 심부 집단과 쇼오부 집단은 끈질기게 버팁니다. 

 

특히 발레테 고개와 살락삭 협로 전투는 매우 치열했습니다. 

 

미군은 점차 일본군의 근거를 박탈해 나갔지만, 종전까지도 저항을 종식시키지 못했습니다. 

 

이 전투의 결과 일본군의 전사자는 약 12,000명, 미군의 피해는 전사자 1,020명 부상자 약 5,600명이었다. 시민의 피해자는 약 1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마닐라 해군 방위대의 잔존 병력은 남부를 탈출하여 켐무집단의 지휘 하에 코세 부대(지휘관 : 코세 키키 해군 대령)로 개편되었습니다.

 

연합군은 바탄 반도와 코레히도르섬의 일본군도 제압, 마닐라만의 안전을 확보하면서 재정비한 마닐라의 항구를 병참기지로 이용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 아주 비참하고 심각한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전투의 결과, 마닐라시의 건물의 대부분이 피해를 받았습니다.

 

당시의 폭격으로 인트라무로스지역은 거의 폐허가 되었습니다. 

 

정부 청사나 대학, 교회 등에 담겨 있던 마닐라 시 창건 이래의 역사적 유물과 미 대사관 건물이 함께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아시아, 스페인, 미국의 문화가 섞여 ‘동양의 진주’라고 불렸던 아시아 최초의 국제도시의 유산, 건축물, 미술품도 완전히 소멸됐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필리핀의 국가적 비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일본군은 단순히 시가전 연루된 시민들뿐만 아니라 항일 게릴라로 의심되는 시민을 대학살했습니다.

 

야마시타 장군은 시민 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마닐라 군사 재판에서 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인트라무로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인트라무로스(Intramuros)는 16세기에 스페인인들에 의해 지어진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으로, 파시그 강 남쪽에 위치한다. 그 명칭은 직역하면 스페인어로 "벽 안에서"가 되며,

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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