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이야기

김주열열사

이궁이 2022. 2. 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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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출생했습니다

살아서 생존했더라면 우리 부모님보다 한살 위였을것입니다.

그가 태어난 44년은 우리가 해방되기 1년전이라 더더욱 나라 안팎의 상황이 힘든 시기입니다.

그는 남원 출신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마산상고 현 마산 용마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끝내 살아서 졸업할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나이 16살 1960년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망원인은 눈에 군 무기용 최루탄을 맞아서 즉사한 것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방송에 나온 것처럼 김주열 열사는 남원에서 마산상고 시험을 위해 마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경찰에게 타살된 3월 아무도 몰래 마산항구에 돌에 묶여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그 주검에 매단 돌이 풀어져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검은 한 신문기자의 투철한 기자정신으로 마산 및 전국에 알려지게 됩니다.

이제 마산은 전국 방방곡곡이었다

고은, <김주열> 중 일부

김주열의 집안은 처음부터 가난한 것은 아닌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할아버지 김태종은 해방의 혼란기에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잣집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병환이 시작되고 가세가 서서히 기울자 김주열은 서울로 올라가 학비가 별로 들지 않는 철도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지만 실패,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그만두게 됩니다.

사실 이전에도 진주고등학교, 남원에 있는 고등학교등에 원서를 써보았지만 집안의 반대와 여러가지 이유로 진학에 실패합니다.

그래서 1년여의 재수와 형 김광렬의 친구이며 형같이 따르던 하용웅의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면 은행원을 하는 것이 지름길이다."라는 권유를 받고 마산상업고등학교에 다시 원서를 내게 됩니다.

마산상고 입시를 치르고 돌아와 1960년 3월 14일로 예정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렬과 함께 마산으로 갔습니다.

이때가 바로 3.15 부정선거를 하루 앞둔 날이었습니다.

군중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꺼린 교육청에서 합격자 발표를 연기하라는 압력을 가해서 3월 16일로 연기가 됩니다.

그래도 하용웅 선배의 담임 선생님을 통해 합격했음을 확인하게되는데요.

당시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였는데 자유당의 부정 선거로 인해 투표 통지표를 못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산에서의 부정선거가 들통이 났고 그로인해 학생들이 시위를 하자 이모 할머니가 집으로 와서 두 형제에게 시내에 나가보라고 합니다.

이 학생들의 시위가 1차 마산의거입니다

이 당시 9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당하게 됩니다.

이에 형제는 이 시위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시위에 나간 두 형제중 김주열이 돌아오지 않고 행방불명이 됩니다.

아들의 행방불명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마산으로 달려가 아들을 계속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4월 11일 남원으로 돌아옵니다.

이 때 어머니의 간절함은 너무나 유명해서 마산시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이러던 중에 이름모를 경찰관이 와서 어머니에게 "소문으로 듣자하니 주열 군이 시위 도중 살해되어 시체가 경남도청 앞 호수에 버려졌다는 소문이 있더군요."라는 말을 하고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이걸 크게 외치자 시위대가 경남도청 앞 호수를 경찰들과 같이 샅샅이 찾아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남원집으로 돌아가던 바로 그날 11시경, 마산의 중앙 부두에서 홍합 낚시를 하던 어부 김기돈의 갈고리에 걸려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신으로 김주열이 발견됩니다.

사망한지 1달 가량 지났지만 당시 바닷물이 굉장히 차가워서 김주열의 시신은 거의 부패되지 않고 처참한 모습 그대로 였습니다.

김주열의 시신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기자였던 허종 기자님이 찍어 특종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그러자 1차 마산의거로 중앙정부로 부터 '용공 분자의 난동과 좌익 폭동'으로 내몰린 마산 시민들의 울분이 다시 터져 올랐습니다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김주열의 시신을 유기한 범인은 경찰 박종표였습니다.

그는 일제시대 때부터 경찰 일을 했습니다.

당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으로, 3월 15일 선거 당일 밤 1차 시위 때 마산시청 앞에서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위 현장에서 즉사한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하고, 손석래 당시 경찰서장의 지시를 받고 다음날 새벽 지프차에 싣고 돌을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유기한것입니다.

그 후 그는 4.19 혁명재판소에서 최루탄을 발사하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유기한 사실을 자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다시 시신 유기만 인정하고 최루탄 발사는 부인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고 합니다.

인면수심이죠.ㅠ.ㅠ

그리고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고 합니다.

김주열의 묘지는 3곳에 있는데요.

실제 묘는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에 있고,

서울 4.19 민주 묘지와 마산 3.15 민주 묘지에 각각 가묘(假墓)가 있다.

중학교 시절 모 잡지를 통해서 알게 된 충청도의 한 고학생 오웅진(세례명 '사도 요한')과 펜팔을 했는데요.

그는 훗날 가톨릭 신부가 되어 꽃동네를 세우게 되죠.

어머니는 국밥집을 하면서 조용히 살다가 1989년 사망하셨고, 큰형도 병에 걸려 43세로 사망했습니다.

1995년 4월 11일 마산상고는 김주열에게 명예 졸업장을 주었고 그 졸업장은 김주열 열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김주열 열사가 마산상고에 입시를 치른 뒤에 합격을 했기 때문입니다.

김주열 열사를 이야기 할때마다 같이 언급되는 인물이 1987년 똑같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 열사입니다.  

각각 4.19 혁명과 6.10 민주 항쟁의 원인이 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데요.

이한열 열사는 머리 뒤쪽에 최루탄을 맞고 한달후에 사망했고

김주열열사는 얼굴 전면부에 맞아 즉사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 발견 소식이 알려지자 2차 마산의거(4월 11일)가 일어나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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