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4.19혁명

이궁이 2022. 2. 1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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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19일 학생이 중심세력이 되어 우리역사에 잊을수 없는 어마어마한 민주주의혁명이 일어납니다. 

 

이를 지금의 우리는 4.19 혁명이라고 합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된 후의 한국은 오랜 시련의 시간을 보냅니다.

 

민주주의는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았고 민중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조차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표방한 정부는 말로만 민주주의를 외치고 자신들의 이권다툼으로 민주화하고는 거리가 멀게 움직입니다. 

 

그런 와중에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말할수 있는 선거가 제대로 진행될리가 없죠.

 

그 대표적인 사례가 이승만 정권이 1960년 3월 15 벌인 대규모의 부정선거입니다.

 

우리는 이를 3.15 부정선거라고 부르죠.

 

이 3.15 부정선거가 자행됨에 따라 이승만정권의 독재를 규탄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게 됩니다.

 

사실 1960년 3월 선거는 사실상 조병옥과 이승만의 승부였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부인 조병옥과 자유당 대통령 후보인 이승만과의 승부가 중요한 승부였는데요.

 

그러던 중 1960년 많은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사망합니다. 

 

조병옥은 선거에서 이승만의 강력한 대적자로 여겨졌었다고 햤죠.

 

이 조병옥의 사망으로 강력한 대적자가 없는 이승만에게 재선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통령 선거보다는 부통령 선거(당시 대한민국은 미국식 정치체계를 따라서 대통령과 부통령이 있었습니다. )에 더욱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때 부통령 싸움은 현직 부통령인 장면 부통령과 이승만의 뒷배가 있는 이기붕 사이에 벌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선거전에서 야당은 계속해서 강력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반공청년단의 폭력과 감시가 있었고 야당의원들이 체포되고, 투표장에 3인조 9인조의 '조'단위로 투표장에 들어가서 자유당을 뽑는지 감시하고, 경찰과 군인 및 일반 공무원들은 공개적으로 자유당후보를 지지하게 됩니다.

 

사실 이 경찰과 군인, 일반 공무원들의 여당후보 지지는 그 이후 군사정권이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적으로 한국사회에 존속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나중에 한 군인의 용감한 자백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죠.

 

어쨌든 이런 행태와 더불어 투표함을 바꿔치기하고 개표를 날조하고 위장으로 자유당 의원을 찍은 투표용지를 미리 만들어놓는등 전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보기 힘든 엄청난 부정선거가 벌어지게 됩니다. 

 

이 부정선거의 결과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이기붕은 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이러한 선거로 인해 국회에서는 민주당이 선거가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전국에 걸쳐 부정선거와 불법선거를 규탄하는 규탄대회가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민심 이반의 분위기 속에서 마산에서 김주열 열사가 눈에 최루탄을 맞아 마산 해변가에 버려진 것이 발견됩니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김주열 열사는 16세의 소년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마산 경찰이 발포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고 버려졌음에 틀림없었습니다.

 

이 소년의 시신 사진이 신문에 실리면서 시민들의 시위가 더욱 격렬해지게 되고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지게 됩니다. 

 

이미 4·19혁명 전 수주일 동안 주로 지방도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불법선거 및 자유당과 경찰의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를 산발적으로 행하여졌습니다.

 

그러나 무능한 이승만 정권은 상황의 급박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때 당시 정부 공식 필름을 보면 얼마나 이승만이 이러한 국민들의 여론이 심각한 상황을 모르고 있었는지 알수 있는데요.

 

국민들은 부정선거에 대한 분개함으로 거리를 채우고 있었을 때 이승만 정권은 여유롭게 미군정들과 경무대에서 차를 마시고 만담을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던 이승만이 마산에서 시위가 격화되고 있던 4월 15일, 이 사건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는 등 민심에 대해 귀를 닫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런 사태에 책임이 있는 “무분별한 사람들”의 죄는 간과될 수 없고, “젊은 청년들”을 폭동으로 유도하고, 선동하는 “정치적 야심가”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활동을 좌시할수 없다는 경고를 합니다. 

 

이러한 이승만의 삽질 담화는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게 합니다.

 

아시다시피 60년은 50년대의 한국전쟁으로 RED COMPLEX (빨갱이, 공산주의에 대한 노이로제 반응)이 극심했던 때인데 그런 민심을 더욱 더 건드린 셈이된 것이죠.

 

4월 18일에는 서울에서 시위하고 있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경찰의 비호를 받고있는 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로부터 습격당합니다.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경찰은 이 데모대에 대하여 발포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이로써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전국적으로 부산·광주·인천·목포·청주 등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가세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울에서만도 수백명이 죽고, 수천명이 부상당하게 됩니다.

 

4월 19일 이후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면서 일반인들도 시위에 가담하게 됩니다.

 

아직까지 군대가 적극적으로 개입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4월 21일 내각이 총사태를 하게 됩니다. 

 

다음날 이승만은 당시 정부 내에서 어떤 직위도 가지지 않은 2명의 정치인을 불러들이는데, 변영태(卞榮泰)와 전 서울시장 허정(許政)입니다. 그들은 사태를 파악하고 이승만 정권의 편입되기를 거절하다가 나중에 허정은 외무부장관직을 수락하게 됩니다. 

 

이 사실은 나중에 이승만이 사임하게 될 경우 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 허정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기붕을 설득합니다. 모든 정치활동으로 물러나라고 말이죠.

 

이에 부통령 장면은 이승만에게 대통령 직에서 사임할 것을 촉구하면서 자신도 부통령직을 사퇴합니다.

 

시위대들은 새로운 선거의 실시 대신에 이승만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이승만은 자기가 자유당을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와 결별했다고 말하고 경찰과 정부관리들이 정치적으로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에 대해 시위군중들은 더욱 강경하게 됩니다.  반공청년단과 자유당간부의 집을 파괴하고 방화하게 되는데요.

 

4월 25일 각 대학 300여 명의 교수들이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나서게 되면서 시위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결국, 4월 26일 새로 지명된 외무부장관 허정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주한 미국 대사 맥카나기(Macanarghy,D.P.)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승만은 대통령·부통령의 선거가 새로 실시될 것이고, 헌법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바꾸어질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즉 이승만의 대통령 직에서 하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이승만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정치권력이 학생들에 의해서 전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새로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된 허정이 과도정부의 수반이 됩니다.

 

4·19혁명 후, 과도정부 허정의 권력기반이 크게 위태로웠던 것은 어쩔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허정은 한국 사회의 어떤 부문에서도 적극적 지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학생과 일반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승만 정권의 계속으로 보였고, 조직화된 정치세력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다고 군부도 지원해주지도 않았구요. 

 

그러나 자유당 입장에서는 이승만이 미리 점찍어 놓고 임명한 허정은 가장 무리없는 존재였고, 민주당 입장에서는 아무 정치조직을 가지지 못한 허정을 적으로 만들 이유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민주당이 아직 정권을 인수받을 입장도 안되고 합법적 절차도 없었기 때문에 허정 정권의 막후에서 영향을 행사하고자 합니다. 

 

5월 3일 허정정부는 정책기조의 방향을 밝히게 됩니다.

 

내정에서는 일상생활과 법·사회조직의 근본구조에 미치는 4·19혁명의 여파를 극소화하고, 반공투쟁이 법과 사회체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또한 대외관계에도 강한 반공노선,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관계 지속을 밝힙니다.

 

그러나 이는 국민들의 기대와는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국민들은 군대내의 부패를 없애고, 선거에서 부정을 저질렀던 자들에대한 처벌, 양당제도의 확립을 위한 조치등을 기대했는데요.

 

이에 대해서 허정 정권은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요. 

 

이러한 방법은 장면이 이끌게 되는 그 후의 정권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오히려 허정은 군부를 개혁하려 하거나, 주요 장성들을 추방하려는 조처를 취하였을 때 생길 수도 있는 군으로부터의 적대적 반응을 두려워합니다. 

 

허정의 과도정부 수반으로써의 기간 3개월 동안 자주 미국관리들과 회동합니다. 

 

또한 선거에서 부정을 저질렀던 자들에 대한 처벌도 "기존 질서내에서의 처벌"을 견지합니다. 

 

그 이유가 과도정부의 공판과정에서 법원과 검찰청의 현직관리들에게 크게 의존할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승만 정권에서도 활약하던 사람들이기도 한 것이죠. 

 

이러한 공판은 장면이 이끄는 다음 정부로 넘겨지면서 장면 정권의 심각한 고민거리가 됩니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리도 국민의 기대에 어긋났다.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를 처벌하겠다는 방침을 반복해서 밝혔으나, 실제로는 몇 사람에 대하여 과거의 부정을 자진신고하게 하고, 부정축재분을 사회에 환원시킨 데 그쳤습니다.

 

이는 장면정부 출범 이후까지도 실제적인 조처가 취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석연찮은 뒷 마무리에도 불구하고 4.19는 우리 현대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민중이 그 전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민주화를 이루어냈다는 것인데요.

 

왜냐하면 우리는 1900년대 전까지 왕정이었고, 1900년대 초반에는 일제와 외세침략으로 민주화를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높은 교육열로 인해 서양에서 전해들어온 민주화를 이론으로 공부한 민주화를 실천적으로 이루려 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른 옆나라들과 달리 위로부터의 민주화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를 스스로 이루려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4.19가 제가 어렸을때는" 4.19 폭동"이었고, 그 이후에 "4.19 의거"였었습니다.

 

그것이 다시 세월이 흐르면서 "4.19 민주화 혁명"이 되었습니다.

 

"4.19 폭동"이었을 때는 정권의 측면에서 정권을 몰락시켰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었고

 

"4.19의거"이었을 때는 그 역사적 의미를 축소하려는 의도였던 말이었습니다.

 

그러던 "4.19"가 "혁명"이 되었을 때 비로소 국민의 민주화 의지가 한 나라의 정권을 심판하고 실천했다는 의미가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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